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기와 더불어 (문단 편집) == 구성 == * 제1권 - 김일성의 어린 시절부터 화성의숙 중퇴와 길림으로 전학 1930년에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의 인생이 서술돼 있다. 이 책에서는 자신의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이 사실은 반공주의 성향의 독실한 개신교 신자[* 김형직, 강반석 부부의 고향 평양은 [[1907년 평양 대부흥 ]]때부터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개신교의 세가 강력하던 곳이었다. 현재 한국개신교의 주류가 극단적인 보수반공반북 성향을 띄는 것도 거슬러 올라가보면 평양의 개신교도들이 해방 이후 공산정권의 탄압을 피해서 대거 월남하면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였다는 것을 은폐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에 교회가 끼친 영향도 모조리 부정한다. [[주체사상]]의 형성에 김일성의 모태신앙이었던 [[개신교]]의 논리가 스며들어 있다는 점은 전문연구자들 사이에서 흔히 나오는 지적이며, [[고영환]] 같은 고위급 탈북자들도 몇차례 지적한바 있다. 화성의숙 중퇴 시기와 사유 또한 김형직의 유언 까지 왜곡하는 불효 패륜을 보여준다. 민족주의자 김형직이 사망하자 때려친 화성의숙을 김형직의 유언을 왜곡하여 자퇴했다고 주장... 당연히 왜곡. * 제2권 - 1930~1933년까지의 일을 회상한다. 그를 돌봐 주었던 [[손정도]] 목사가 얼마나 자신에게 잘 대해주었는가를 서술하였다. 그런데 김일성의 주장과 달리 손정도 목사 가족은 그저 얼굴이나 알던 사이이며 친밀했던 사이란걸 부정한다. 손정도 목사가 유명인이고 당시 김일성의 만주 행적을 증명할 유일한 주요인물이기에 과장하지 않았나는게 현재 평가. 다만 이 이야기는 가족마다 주장이 다르다. 한편 책에서는 그것 때문에 정은 있었는지 [[미국]]에 살던 손정도의 [[차남]] 손원태 [[박사]]를 초대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손정도 목사의 [[장남]] [[손원일]] [[제독]]은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자로 [[6.25 전쟁]] 당시 김일성과 적대했다. 그의 원래 이름이 김성주이며, 그의 선배가 쓴 <조선의 별> 이라는 시에 영향을 받아서 김일성이라고 개명했다고 말한다. * 제3권 - 가장 긴 책이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의 독립운동을 한 걸 회고한다. 당시 한국 독립군 게릴라, 중국 빨치산들과의 관계를 서술하였다. 자신이 만주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와 싸운 전투를 언급한 것들이 있는데, 일본 공식 문헌에 있는 것과 없는 것도 있다. 김일성이 만주에 있는 반일 인민유격대를 통합하여 1934년 3월에서 5월까지 ‘조선인민혁명군’을 창설했다고 하였고, 조선인민혁명군이 나중에 [[동북항일연군]]에 제2군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북한 자료 외에 일본 자료나 중국공산당 자료에는 이러한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기록은 없다. 또한, 동북항일연군의 총사령관은 중국공산당의 양징유이고, 제2군 군장도 중국인 왕더타이였다. 김일성은 이 당시 제2군 제6사의 사장으로 싸우고 있었다. 즉 중국공산당이 지휘하는 항일무장부대에서 1~200명 규모의 조선인 소부대를 이끄는 말단 지휘관이었는데, 중국공산당을 완전히 빼버리고 마치 자신이 만주 지역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혼자서 이끈것 처럼 엄청나게 뻥튀기 한 것이다. * 제4권 - 1935년 2월부터 1936년 5월까지 항일전투 기록을 담고 있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인종차별]] 문제를 서술했다. 1931년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고 이것을 국내 언론(조선일보, 동아일보)가 터무니 없이 부풀려서 [[만보산사건 오보사건]]이 일어나면서 한반도에서 반중 정서가 폭발하였다. 이러면서 [[1931년 화교배척폭동]], [[1931년 평양화교 학살]]이 일어난다. 이것이 다시 만주에 전해지면서 이번에는 중국국민당 계열의 봉천군벌에 의해서 조선인에 대한 학살과 약탈이 일어나고, 중국공산당도 내부의 조선인 당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진행한다. 1935년이 되면 일단 겉으로는 조용해졌지만, 만주 전역에서 조선인에 대한 공공연한 차별이 만연하게 된다. 이 문제의 해결은 김일성 자신이 했다고 주장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대황위회의 기록에는 김일성의 존재가 없다. 또한, 이때는 김일성의 만주항일무장운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시기인데, 자신이 조국광복회를 조선 국내와 만주에 창설하였다고 하는데, 조국광복회에 대하여는 많은 역사적 문헌들이 있고, 이 회의 본명은 ‘재만한인조국광복회’이며, 창설자와 조직망도 잘 조사되어 있다. 여기에도 김일성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 제5권 - 1936년 5월부터 1937년 3월까지 김일성이 [[일본군]]과 싸운 이야기를 서술하였다. 여기에 몇몇 빨치산 인물들이 언급된다. 이들 중 몇 명은 북한에서 중요한 요직에 앉은 이들의 부인 자리에 앉게 된다.그리고 김일성은 남만에서의 싸움이 자랑스러웠다고 썼다. 이때 김일성이 우리말로 <삼일월간>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냈다고 하는데, 그런 건 없다. 자신과 천도교와의 관련성을 설명하고 있다. 김일성은 자기가 항일운동에 유용하게 이용한 조국광복회와의 관련을 설명하면서 [[천도교]]를 민족종교라고 주장하며, 끝으로 김일성은 자기들의 투쟁이 인민들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운동이라고 평가하고, 인민과의 유대성을 강조하면서 제5권을 마친다. * 제6권 - 이때부터 김일성이 사망 뒤에 책들이 나온다. 그가 쓴 유고를 모아 사망한 후에 출판했다는 추정이 가능, 시기적으로는 1937년 3월부터 11월까지에 일어난 일을 김일성이 회고했던 것이다. 북한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회상이 적혀있다. 5권까지는 생소했던 김일성의 별칭 [[사령관|김사령]]도 나오고, 김일성과는 달리 북만에서 활동했던 [[김책]]이 김일성과 함께 "따바리잠"을 잤다는 에피소드도 나온다. 따바리잠이란 한 장의 모포를 놓고 여럿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자는 것. 문화어로 "똬리잠"이라 하며 "따바리잠"는 이의 준말. (출처: 현대조선말사전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 저)) * 제7권 - 1937년 11월부터 1940년 3월까지 김일성의 만주에서 한 마지막 항일운동을 회고하고 있다. 열하 원정도 얘기하고, 양징유를 만났던 것도 회고한다. 여기서 제1차 [[고난의 행군]]이 언급된다. * 제8권 - 1940년 3월부터 1945년까지 김일성의 활동이 회고된다. * 2020년 7월 후속편인 <민족과 더불어>가 출간되었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2702|#]] 해방 후부터 사망 전까지 김일성의 행적을 다뤘다고 하지만 북한 도서가 늘 그렇듯 말도 안되는 허위와 과장으로 점철될 가능성이 높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